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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치던 방 (이완민, 2016)

누에치던 방

이상한 영화다. 이완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누에치던 방>(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 수상)말이다. 영화를 처음 보고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과거와 현재가 병치돼 있는데다 현재의 시간대에 꿈이었을 장면이 불쑥 들어오기도 하고 또 갑작스럽게 ‘이벤트’에 가까운 장면의 난입도 있다. 영화는 이 당혹스러운 많은 것들을 제 안에 넣어두고는 관객에게 요리조리 퍼즐을 맞춰보라고 하는 듯했지만 정작 관객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하는 지점들에선 일절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부정확한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길 영화는 정말로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직도 <누에치던 방>에 대해선 많은 것들이 의문인 채로 남아있다. 서사는 덜컹댔고 매끄럽지 않게 나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두 번째로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나는 그 덜컹대는 이야기의 마디마디에서 서로를 껴안아 주는 여자들이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아픈 그녀들의 마음을 지켜보는 일로 이 덜컹댐을 견뎌보게 됐다.

영화의 과거와 현재는 이상한 방식으로 만난다. 그 기이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두 여자가 있다. 현실 속 미희(이상희)와 현실 속 소녀(김새벽)다. 소녀는 지하철 승객들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한마디를 부탁한다며 종이와 펜을 건넨다. 미희는 소녀를 보자마자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회피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듯 받아든 종이와 펜을 서둘러 자신의 가방에 넣고는 눈을 질끈 감는다. 왜 그랬을까.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는 소녀를 따라 가보던 미희는 누군가의 집 앞에 홀리듯 이른다. 성숙(홍승이)의 집이다. “미안해. 그런데 우리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잖아.”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여자 미희의 이 말에 성숙은 의아해하지만 피하지 않는다. 미희가 진짜 친구인 양 편히 대해준다. 하지만 다음 신에서 성숙은 자신의 동거인이자 미희가 말한 단짝 친구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익주(임형국)에게 말한다. “어떤 모르는 여자가 집에 찾아왔어.” 성숙은 어째서 완벽한 타인인 미희를 내치지 않고 집에 들였을까. 이어서 성숙은 익주에게 이름 하나를 말한다. 유영(김새벽)이었다.

고교 시절, 유영과 성숙(이주영)은 단짝이었다. 유영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고, “억압돼 있는 걸 표현” 하고 싶어서 글을 쓰며, 세상을 향해 투사처럼 달려들고도 싶다.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선 것들이 죄다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을 지나오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니 유영은 오직 과거의 시간에만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성숙 앞에 나타난 미희는 유영일 수가 없는 일이다. 미희도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인 척) 사칭한 적 없다”고. 그렇다면 미희는 어쩌려고 처음 보는 성숙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미희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한때는 시집을 읽고 연극도 보러 다니던 미희였지만 지난 10여 년간 세상과 단절된 채 낙담할 일들만 겪어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교 시절의 미희에게서는 이미 신경질적이며 강박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미희 역시도 단짝 친구 근경(정원)과 단절을 경험했다. 아픈 미희가 성숙을 보자마자, 혹은 지하철에서 소녀를 보자마자 과거의 근경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미희의 즉흥적인 속내를 내치치 않고 받아들인 성숙의 태도에 관해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생판 모르는 미희가 불쑥 자신의 과거(더 정확히는 유사 과거)를 끄집어 들고 왔을 때 그 예상치 못한 침입/방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성숙의 기질과 성정에 기댄 일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 성숙은 미희를 내치지 않고 품어버린다. 홍승이라는 배우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이어서 모든 걸 다 말하는 것과 모든 걸 다 말하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를 두고 미희와 성숙이 나누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안 주려면.” 성숙의 이 말은 그대로 미희를 다독이는 말이 되었다가 미희를 향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미희의 방에서 나란히 누워 성숙이 미희를 안아주고 미희가 아픈 성숙의 보호자로서 달려가고 있다. 연고 없던 두 사람 사이에는 신기하게도 미더운 연이 생겨나 있다.

시제의 오고감 속에서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또 하나는 유영과 소녀의 동일한 얼굴이다. 김새벽 배우가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관객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따라붙던 유영이라는 과거의 인물이 현재 실존하는 인물로 출현할 때마다 보는 이는 긴장이 된다. 서로 다른 인물을 어떻게든 연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아 애가 탄다. 성숙과 익주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유영보다도 현실 속 소녀의 존재가 더 미스터리하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유영을 대신해 현재에 진짜 살아있는 유영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귀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일이다. 이 소녀는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 영화의 후반, 소녀의 마지막 한마디 앞에서 느끼는 또 한 번의 당혹이란. 관객은 이 소녀를 어떤 존재로 봐야 할까.

<누에치던 방>은 다 지나 가버린 과거를 끈덕지게 붙들고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의 과거는 과거가 됐기에 낡고 쇠락했으며 쓸모 하나 없는 것으로서 고루하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게 다 낡아 버리고 빛이 바랬다 해도 중요한 건 중요한 것 그대로라고 말한다. 세련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촌스러움이 아프다. 그런 아픔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사는 이들을 용감하게 안아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불현듯 꿈에서 미희가 소녀에게 건넸던 메모지의 말이 생각난다. ‘용기를 가지고 살자.’ 텅 빈 메모지를 돌려받았던 소녀에게 미희의 이 말은 전달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메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희에게 수신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2018년 1월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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