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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각색해보는 영미문학 프로젝트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글: 백승빈(영화감독)|2017.08.11
[내 마음대로 각색해보는 영미문학 프로젝트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이번 글이 마지막 수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왜 어떤 책에 대해 좀 더 특별하게 할 말이 많다거나, 어떻게 해서 그 책이 내 마음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관해 주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아직은) 그 이유가 내 창작의 비밀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분량은 채워야 하고 비밀은 숨겨야 하니까, 다소 수박 겉핥는 식의 이야기가 되더라도 그에 관한 수다를 산만하게 떨어볼까 한다. 그러니 앞으로 이어지는 글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계획적이고 (조금은 의뭉스러운) 중간정리 정도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이다. 얄밉겠지만 어쩔 수 없고, 그 대신, 소개되는 책들은 다 읽어버린 것이 인생의 황량한 구멍을 남겨놓은 느낌을 줄 정도로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니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장바구니에 넣어둘 것을 조심스레 추천하는 바이다.


그레이엄 그린, 「Travels with My Aunt 이모와의 여행」

첫 번째는, 죽은 엄마의 화장터에서 처음 만나 자신을 ‘이모’ 라고 소개하며 내 손에 (당신이 직접 꺾어온) 들꽃 무더기를 쥐여준 그분과의 몇몇 일화를, 그레이엄 그린의 「Travels with My Aunt 이모와의 여행」처럼 각색해보는 프로젝트이다.

첫 번째 칼럼, 「펀 홈」 에 대한 글에서 소개했던 엄마의 활력 넘치는 여자 친구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그분의 얼굴은 그 옛날, 아마도 스물 몇 살이었던 것 같은 엄마의 여행 사진 속에서 처음 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독사진을 똑같은 앵글로 하나씩 찍어준 그 장소는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해변처럼 보였고, 한껏 포즈를 잡은 그들은 고전 흑백영화 속의 주인공들, 그러니까 마치 캐서린 헵번과 나탈리 우드처럼 당당하고 우아했다. 그중에서도 캐서린 헵번처럼 후리후리한 아름다움을 조용히 뿜어내던 그 여성이 바로 내게 들꽃 무더기를 쥐여준 바로 그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쓰인, 그레이엄 그린의 「Travels with My Aunt 이모와의 여행」에서도 은퇴한 은행 매니저인 주인공 남자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화장된 유골함을 기다리며, ‘난생처음 보는 이모’의 접근을 받아 인사한다. 메리 여왕처럼 차려입고 등장해, 죽은 엄마가 사실은 그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알려준 그 이모란 여자는 조카와 함께 파리와 이스탄불을 함께 여행한다. 물론, 이런 에피소드까지 내 경험과 닮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웃기고 재밌는 책이고 언젠가 (초현실적이다 싶은) 기회가 오면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 그런 기회 속에는 (내가 이모로 캐스팅하고 싶은) 틸다 스윈튼이나 케이트 블란쳇이 캐릭터의 나이와 얼추 맞는 시기가 되었다는 조건까지 포함되어 있다.

존 어빙의 「가프가 본 세상 The World according to Garp」은 내가 준비도 못 하고 갑작스레 세상을 뜨지 않는 한, 죽기 직전에 몇 장이라도 다시 들춰보며 감상에 빠지고 싶은 그런 책일 것이다. 아마도 그때 나는 이 책을 4부작 시리즈로 만들 기획안을 평생 가지고 살았고, 죽기 일보 직전인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하고 슬플 것이다. 오랫동안 내가 상상한, 러닝타임 240분의 4부작 텔레비전 시리즈에선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가프’였지만, 몇 년 전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턴 세스 로건으로 슬그머니 얼굴이 바뀌었다. 아무리 내 머릿속의 극장이라지만, 죽은 사람을 캐스팅해 계획을 굴려보는 것까진 잘 안 되더라. 그리고 그 책의 실질적인 심장(heart)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가프의 어머니) ‘제니’가 있다.


존 어빙, 「가프가 본 세상 The World according to Garp」

‘가프’의 어머니, ‘제니 필즈’는?세계대전 중에 부상병을 치료하던 간호사였고, 평생 간호사복을 입고 지낸, 열혈?여권 운동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죽기 전까지 소설가 아들 ‘가프’를?열성적으로?지원하고 격려했던 멘토이자, 그의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강한 어머니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저 커버 사진을 볼 때마다 매번,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간호사복은 결국 ‘제니 필즈’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가프’의 인생도 종말을 고한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난 ‘가프’가 벽 앞에 우두커니 서서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이 커버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짠해지고, 러닝타임 240분의 4부작 텔레비전 시리즈에 대한 (소명에 가까운) 계획을 다듬는다. 그 (초현실적인) 기회 속에서 나는, 이를테면, 넷플릭스 임원 회의에 참석해 4부작 정도의 시리즈의 기획안은 얼마든지 피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기회 속의 나는 제2의 봉준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초현실적인’ 기회 속에서 말이다.


찰스 포티스, 「트루 그릿-진정한 용기 True Grit」

세 번째 프로젝트는, 이미 존 웨인이나 제프 브리지스 주연의 영화 <더 브레이브 True Grit>로 유명해진 찰스 포티스의 「트루 그릿-진정한 용기 True Grit」. 나는 이 책의 1인칭 주인공 화자인 ‘매티 로스’의 목소리를 정말로 좋아하는데, 책을 펼칠 때마다 매번 그의 대사를 소리 내 따라 읽어볼 정도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친 자를 처치하고 복수를 완성하고자 먼 길을 떠나는 14살짜리 소녀라는 인물 설정 자체도 끝내주게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치도록 깐깐하고 자기 앞가림에 능숙하며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 당당한 애티튜드의 목소리가 너무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복수를 완성시켜줄 사람을 찾아다니던 ‘매티’가 악명 높은 연방보안관 ‘루스터 코그번’을 고용하기 위해 찾아온 장면 속, 두 사람의 대화는 볼 때마다 두근두근하다.

“저를 영 하찮게 생각하시는 군요, 코그번 씨.”
“아니, 난 네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네 생각 따윈 아예 하질 않아.”
“정부로부터 2달러, 이동 거리에 따라 1.5km당 10센트씩, 거기에 사례금으로 50달러를 드릴게요.”
“제법 열심히 조사했군.”
“그럼요, 애들 장난이 아니니까요.”

비교적 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코엔 형제의 영화 버전이 내게 특히 좋았던 것은, 이런 ‘매티’를 거의 완벽한 캐스팅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었다. 스크린에 ‘헤일리 스테인펠드’의 고집불통스러운 얼굴이 나오는 그 순간의 쾌감이란.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책의 스토리라인을 느슨하게 각색한 이야기를 조금씩 굴려보았는데, 내가 상상하는 이 책의 각색 버전은, (좀 어이없을 수도 있겠지만) 무신란(1170년)이 일어나고 몇 해 지나지 않은 시기의 고려를 배경으로 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벽란포구 뒷골목의 좁은 길을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비틀대며 걸어가면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매섭게 불어대는 을씨년스런 바닷바람에도 거친 모시 적삼과 홑겹의 천 바지, 볏짚을 대충 엮은 도롱이를 걸친 채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열 몇 살짜리 아이. 품에 꼭 끌어안은 작은 봇짐을 귀한 보물이라 생각해 달려든 거지 사내아이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좀처럼 밀리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이 작은 몸집의 소녀에겐 보이는 것과는 다른 단단하고 비범한 면모가 숨어있다.

그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란 소년들 중에 대장 격인 아이의 어깨춤을 붙잡은 이 여자아이는 비상식량인 도토리 수십 알을 던져주며 소원을 이루어주는 불상이 있다는 다원(茶園)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자아이가 천릿길을 걸어 벽란포구를 찾은 것은 이곳에 있는 한 다원에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불상이 있어 거기에 진실로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상이 있는 다원에는 이 아이는 물론이고 포구에 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원에 사는 세 명의 여자들에 관한 것으로, 사실 이들은 무신란에서 공을 세워 신분이 해방된 여인 무사들이다. 그들은 불상이 있는 방의 뒷벽에 숨어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몰래 듣고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해결을 해주는 해결사 노릇을 틈틈이 하고 있었던 것.

어느 골목에 숨어있듯 자리한 다원을 찾아낸 여자아이는 불상 앞에 엎드려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점차, 당상역관 외동딸의 몸종이었던 이 아이가 어떤 연유로 자신이 모시던 아씨와 그의 집안을 멸문지화 시킨 좌우승 장군의 목을 베고 싶어 하는지가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여자아이는, 이 영화의 ‘매티’이고, 세 명의 여성 무사들 중 캡틴이 ‘루스터 코그번’, 두 번째 무사가 (현상금을 노리고 합류한 특수경비대원) ‘라뷔프’ 인 셈이다.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좀 억지스러운 연결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상관없지. 나는 그야말로, ‘grit / 용기, 근성, 끈기, 담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니까. 즉, 이 영화가 ‘매티’처럼 당당하고 용감한 여자들이 메인이 되는 여성주의 무협 드라마가 되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좀 더 그럴듯하게 완결된 형태의 트리트먼트와 초고 수준의 시나리오도 있지만, 이런 기획에 대해 슬그머니 수다를 떨어본 친구들의 반응이 내 기대에 조금 못 미쳐서 더 이상 개발시키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런 글의 분량을 채우며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정리해 보는 것으로 만족. 일단락.

마지막으로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프로젝트의 원작은, ‘희곡 (drama)’ 으로, 2010년 퓰리처상 ‘drama’ 부문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브라이언 요키, <넥스트 투 노멀 Next to Normal>

퓰리처상 drama 부문 수상작은 대부분 ‘play (연극)’ 대본일 확률이 높지만, 가끔씩 <렌트>나 <해밀턴> 같은 뮤지컬 대본이 탈 경우도 있다. 2010년에도 심사위원들이 추천한 최종 후보작들은 모두 연극 대본이었으나, 브라이언 요키의 <넥스트 투 노멀 Next to Normal>이 깜짝 수상작이 되면서 여러 말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조울증에 시달리며 약 없이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중년의 가정주부가 주인공인 이 희곡은 그가 전기충격요법을 받는 부분을 클라이맥스로 두고, 결국 혼자 집을 떠나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이례적으로 어둡고 심각한 스토리라인의 ‘가족 뮤지컬’이다. 이 이야기에서 독특하게 흥미로운 설정은 주인공 다이애나가, 갓난아이 때 죽은 아들(게이브)을 십몇 년 동안 자신의 환상 속에서 무럭무럭 키워왔으며 두 사람끼리 대화를 나눈다는 것으로, 이는 극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에겐 “난 살아있어! I’m alive!”라고 끊임없이 외쳐대고 노래를 부르는 ‘환상 속의 아들 (imaginary son)’는 물론이고, (학교에선 굉장한 수재로 주목받아도) 집안에서는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딸(나탈리)도 있는데, ‘수퍼보이와 투명소녀 Superboy and the Invisible Girl’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나탈리의 시그니처 테마이다. 결국, 나탈리는 엄마의 처방약을 몰래 훔쳐 복용하기 시작하고 환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캐릭터가 아버지이자 남편인 ‘댄’이지만,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한숨 나오긴 마찬가지다. 결국 그에게도 환상 속의 아들이 찾아와 노래를 주고받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소원하고 기대하는 엔딩치고도 참 가차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긴 밤이 지나면 빛이 찾아올 거야.’라고 합창하는 등장인물들의 마지막 노래로 끝나는 이 작품의 엔딩은 다음과 같다.

ALL: (sung)
Day after day
We’ll find the will to find our way
knowing that the darkest skies will someday see the sun

DAN:
When our long night is done

DAN and NATALIE:
There will be light

DIANA:
There will be light

ALL:
There will be light
When we open up our lives
Sons and daughters, husbands, wives
Can fight that fight

There will be light
There will be light
There will be light
There will be light

(Lights fade.)
End of Act 2. Curtain.


마치,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21세기 록-뮤지컬의 형태로 다시 쓴 듯한 이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을 배경으로 각색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을 만큼 보편적인 구석이 있다. 물론, 메이저 투자사 피칭 자리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냐’는 무언의 비아냥과 놀림 같은 걸 받을 수 있겠지만, 독립영화의 시스템 안에서라면 격렬하고 흥미진진한 작가 정신을 발휘하기에 매우 좋은 아이템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뮤지컬이 될 것이니까. <레미제라블>같이 현장에서 모든 노래를 레코딩한다는 계획에 많은 예산이 들어가겠지만, 그것이 이 작품만의 영화적 전략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

자, 이번 글이 마지막 수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왜 어떤 책에 대해 좀 더 특별하게 할 말이 많다거나, 어떻게 해서 그 책이 내 마음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관해 주로 이야기했어야 했지만, (아직은) 그 이유가 내 창작의 비밀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도 분량은 채워야 하고 비밀은 숨겨야 해서, 다소 수박 겉핥는 식으로 그에 관한 수다를 산만하게 떨어보았다.

지난 몇 회간 이 코너를 통해 주절대본 영미문학 각색 프로젝트는 사실상 나에게만 의미 있고 재미있지,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그냥 대부분 시답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코너에서 소개한 몇 권의 책들은 분명히 장바구니에 넣어둘 만한 재밌고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왜 그런 거 있잖나, “그 책을 다 읽어버린 것은 내 인생에 황량한 구멍을 남겼다. David Copperfield, the last novel I read, and the completion of which has left a devastating hole in my life”, 고 감상을 얘기할 만한 경우들. 사실, 저 말은 「데이빗 커퍼필드」를 읽은 후 ‘닉 혼비’의 표현인데... 마음에 들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이 몇 개의 각색 프로젝트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초현실적인) 기회가 찾아와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저런 표현이 가능한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end.

#1 펀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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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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