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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새 (폴 그리모, 1980)

디즈니가 1934년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발표하자 전 세계적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광풍이 휘몰아쳤다. 이후 다른 제작사들이 디즈니의 아성에 도전하곤 했지만 흥행에 참패하거나 무리한 투자로 망하는 등 그 뒤를 쫓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다.

영화 종주국 프랑스도 예외 없이 디즈니를 견제했다. 폴 그리모(Paul Grimault)라는 한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가 앞장섰는데, 그의 단편 <장난감 병정>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뒤 상업성 높은 장편을 적극 권유받았기 때문이다. 소재로 택한 것은 안데르센의 유명한 동화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 하지만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나름의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창작품으로 구상했다.

우선 원작에 나오는 염소발 장군을 타키카르디 왕국의 사팔뜨기 폭군 샤를 16세로 바꿨다. 사팔뜨기가 아닌 정상적인 눈으로 그림을 고친 초상화에서 갑자기 가짜 폭군이 튀어나오고, 그는 진짜 왕을 없애고 만다. 그리고 다른 두 장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굴뚝 청소부와 양치기 소녀의 사랑을 방해한다. 사랑의 도피를 시작한 연인은 왕국의 호위대에게 쫓기기 시작하고, 지하에 억눌려 살던 백성들과 힘을 합쳐 폭정을 뒤엎어 버린다는 내용이다.

이런 파격적인 플롯에 고전적인 스타일의 작화와 프랑스 특유의 유머 코드를 섞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후반부에 호위병들이 연인을 쫓는 장면은 매우 박진감이 넘치고 서스펜스 느낌까지 들게 한다. 또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공상과학적인 기계 장치들은 그 이색적인 분위기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때문에 아동용이 아닌 어른들도 볼 수 있는, 디즈니와 구별되는 작품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프로듀서 앙드레 사뤼와 그리모가 제작비 문제로 충돌이 나면서 작품은 미완성인 채로 1950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공개되고 말았다. 물론 이전에 없던 높은 평가를 받으며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는다. 당시 그 작품의 수상 문제로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려 대립했다고 하는데, 세계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그리모 측을 지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미 소송을 걸고 있던 그리모는 이 건으로 1953년 판결을 받아 작가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다. 반면 사뤼 측은 흥행 수입의 일부만 갖는 조건으로 영화관 개봉을 인정받게 된다. 그렇게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는 그해 5월 대중에 첫선을 보였다. 프랑스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내세웠지만 흥행은 썩 좋지 못했다.

울분에 찬 그리모는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작사를 세우고 1967년 재판에서 최종 승소해 작품의 모든 권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다른 옛 동료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그동안 있던 자료들이 많이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시킬 생각을 해낸다. 제목도 <왕과 새 Le Roi et l’oiseau>로 바꾸었다.

천신만고 끝에 국립영화센터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으며 1977년 <왕과 새> 작업에 들어간 그리모는 삭제된 장면은 되살리고 좋지 않은 그림은 다시 그려 재촬영을 한다. 목소리와 음악도 새로 입혔다. 그렇게 작품은 30년 만에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때문에 <왕과 새>는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큰 진통을 겪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보다 <왕과 새>는 후대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더 큰 의의를 갖는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함정에 빠진 장면이나 성에서 벌어지는 추격 신 등 무대 이미지와 시추에이션 등에 <왕과 새>를 상당 부분 오마주했다. 그는 2001년 프랑스 파리의 애니메이션 축제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로 그리모를 꼽았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볼 수 있는 작품을 지향하는 미야자키의 작품관도 <왕과 새>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왕과 새>의 폭군이 조종하는 로봇은 이후 거대 로봇의 효시가 된다. 과학 기술의 결정체이자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이 로봇은 굴뚝 청소부와 양치기 소녀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악의 대리자로 그려진다. 특히 폭군이 머리에 탑승해 조종하는 설정이나 다양하게 등장하는 무기들이 눈에 띈다. 그전까지 애니메이션 영화에 이런 류의 로봇은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후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철인 28호>나 나가이 고의 <마징가 Z> 등 거대 로봇 만화의 탄생에 영향 끼친 바가 크다.

이렇듯 <왕과 새>는 작품의 내용 이상으로 애니메이션 사에 영향을 끼친 측면에서 더 많이 살펴봐야 하는 기념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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